핑크팀 'KIM'은 한국인이라면 이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올 겁니다. 제가 그랬어요. 독일 브랜드에서 만든 단정한 생김새의 스피커가 난데없이 김 씨랍니다. 그러고 보니 제조사명도 설립자인 칼 하인츠 핑크의 성에서 따왔으니, 핑크 씨가 만든 김 씨 스피커 정도가 되겠습니다. 킴은 스타 트렉의 작중 인물인 해리 킴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으로 핑크팀의 또다른 스피커인 보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이 만든 작품에 본인이 애정하는 작품의 인물명을 붙이는 유쾌한 이 아저씨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피커 엔지니어입니다. 칼 하인츠 핑크는 어린 시절부터 취미로 즐기던 오디오에 푹 빠진 것이 결국 업으로 이어진 전형적인 덕업 일치의 한 명으로 Q어쿠스틱스, 와피데일, 미션, 데논, 탄노이, 캐슬 등 수많은 하이파이 브랜드에서 스피커를 개발한 경력이 있습니다.
2016년에 칼 하인츠 핑크는 마란츠의 산증인인 켄 이시와타의 요청으로 뮌헨 쇼에서 마란츠의 앰프와 함께 출품될 스피커 WM3를 제작하게 됩니다. 이를 상용화시킨 스피커가 15인치 대형 우퍼 드라이버를 장착한 핑크팀의 첫 번째 스피커인 WM4입니다. 이후 10인치 드라이버를 사용한 플로어스탠딩 스피커 보그를 출시했고, 오늘 소개하는 킴이 그보다 작은 궤짝형 스피커로 핑크팀의 공식적인 세 번째 스피커이자 막내에 해당합니다.
남다른 규격을 자랑하는 WM4는 논외로 하고요. 보그와 킴은 서로 공통점이 많습니다. 사이즈는 다르지만 두 제품 모두 AMT와 페이퍼콘 드라이버의 2웨이 구성이고요. AMT를 사용하는 여느 제조사들에서 보기 어려운 긴 AMT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주름치마처럼 다이어프램을 접어서 만드는 AMT는 그만큼 다이어프램의 면적이 넓은데, 가뜩이나 넓은 녀석을 이렇게 더 길게 만들어서 면적을 더욱 넓혔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말씀드리겠지만 이렇게 길쭉한 생김새 덕분에 제가 생각하는 AMT 특유의 모난 성격이 다듬어질 수 있었던 듯합니다.
이중 구조의 단단한 인클로저라든지, 그것보다도 더욱 두껍고 세밀하게 가공된 전면의 배플, 또는 인클로저 내부를 비우는 대신 헬름홀츠 공진기를 사용하는 공진 기술이나 후면으로 뚫린 포트 등의 기술적인 부분들은 몸보다는 머리로 일하는 것을 선호하는 칼 하인츠 핑크의 주도 아래 만들어진 기술력의 결과물입니다. 이런 덕분에 킴은 제가 들었을 때에는 작업 용도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전 음역대에 걸친 선형적인 음색과 질감, 그리고 빠르고 정확한 소리가 일품이었습니다.
그밖에 후면에는 고역 조절 노브, 그리고 함께 물리는 앰프의 댐핑 팩터에 따라 선택하는 삼 단계 조절 노브가 위치해 있습니다. 고역 또는 저역 톤 조절 기능을 종종 본 적이 있지만 앰프 매칭에 맞춰 선택하는 조절 노브는 생소합니다. 댐핑 팩터가 높은 TR 앰프에 물리는 경우에는 1번, 진공관 앰프에 물리는 경우에는 3번을 권장한다는데 저처럼 하이브리드 앰프는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서 일단 전부 들어 봤습니다. 무언가 미묘하게 질감이 달라지는 듯한데 선뜻 어느 쪽이 뚜렷하게 더 좋다는 느낌은 딱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약간이나마 보다 힘이 붙는 듯한 1번으로 맞춰서 사용했습니다.
AMT를 사용한 스피커들은 중고역대의 해상력이 장점인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경험상 AMT와 함께 사용된 다른 종류의 드라이버에서 만들어진 소리와 서로 잘 섞이지 않는 듯한 이질감이 드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으면 아래쪽과 위쪽이 서로 다른 지휘에 맞춰 연주하는 것 같아서 자꾸 신경이 쓰이는데, 킴은 AMT 기반 스피커 중에서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쪽이었습니다. 크로스오버 주파수를 2.2kHz로 AMT치고는 제법 내려 두어서 보다 넓은 대역을 온전히 AMT가 담당한 덕분일 수도 있겠고, 혹은 보통의 규격보다 큰 다이어프램이 AMT의 섬세함뿐 아니라 에너지까지 더해 주는 덕분일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들었던 AMT들의 대부분은 마치 레이저처럼 소리가 앞으로 쭉 뻗어 나가는 직진성을 가졌습니다. 이게 소리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고요. 저는 이렇게 '나 이런 드라이버예요!'라고 소리로 티를 내는 경우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치 아티스트보다 엔지니어가 더 주목받으려 하는, 일종의 주객전도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킴은 AMT의 티가 많이 나지도 않았습니다. 애초에 그 티가 덜 났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것처럼 페이퍼콘 드라이버 자연스럽게 하나의 소리로 어우러질 수 있었을 겁니다.
이렇듯 킴은 제가 생각하는 기존 AMT의 부작용은 최소화하면서 AMT가 가지는 뛰어난 해상력은 그대로 취했습니다. 해상력이 뛰어난 만큼 정위감도 대단히 좋아서 무대의 뎁스 표현도 탁월하고요. 소리가 앞으로 뻗어 나가는 느낌을 줄이되 좌우로의 확산을 잘 이루어져서 넓고 입체적인 공간을 형성합니다. 넓은 무대를 고루 활용하면서 또랑또랑하게 음상을 잡아 내니 듣는 재미가 참 좋습니다. 다만 음상이 정확하게 맺히는 만큼 스윗 스팟은 좁은 편이었습니다. 듣는 데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정확하게 자리가 잡히는 입체적인 정위감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선 어느 정도 좌석의 위치를 제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녀석들이 오디오 쇼와 같은 다수가 참여하는 행사장에서는 힘을 잘 못 씁니다. 이렇게 개인 시청실에서 오롯이 혼자 좋은 자리에 앉아서 들을 때와 평가가 많이 달라집니다.
얼마 전 일본 웹진인 파일웹에서 뽑은 테스트 용 플레이 리스트 중에 히로시 요시무라의 '서라운드'가 포함되었습니다. 노래라기보다는 소리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음체적인 음장감을 들려 주는 데에 특화된 트랙입니다. 듣고 있으면 마치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 명상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곡의 특성상 섬세한 셈여림 표현이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음상의 전후 움직임, 전경과 배경의 구분 등이 살아나는데, 킴은 수많은 레이어가 겹겹이 쌓인 것처럼 굉장히 디테일하게 들려 줬습니다. 오디오파일 입장에서는 이런 곡, 이런 느낌이 힐링이고 명상이겠죠.
윤하의 오르트 구름은 제가 듣기에 밸런스가 정말 좋다고 생각하는 곡 중 하나입니다. 든든한 저역 위에 보컬의 존재감도 분명하게 드러나야 하고, 빠르고 경쾌한 분위기의 곡이어서 이런 리듬을 잘 살려야 합니다. 특히나 좌우로 확산되는 기타 현 소리의 질감과 거리감이 어떻게 표현되느냐가 저에게는 중요한데, 이 부분이 원래 제가 기억하는 AMT하고 사뭇 다르게 시원하게 좌우로 열어서 들려 줍니다. 그래서 무대의 모양이 좌우로 넓은 타원형이 그려지는, 제가 이 곡을 들을 때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양이 만들어집니다.
킴의 중고역은 마치 출력 좋은 세단이 노면에 쫙 깔리면서 안정적으로 주행하는 듯한 여유가 느껴집니다. 실리는 힘이 좋은데 그걸 굳이 무리해서 티를 내려 하지 않는 게 좋았습니다. 확실히 눈에 보이는 것만큼 소리적으로도 AMT의 존재감이 대단합니다. 조금 부담이 될 정도의 큰 볼륨에서도 소란스럽지 않으면서도 볼륨에 맞춰 무대가 확장되면서 시원하게 탁 트인 듯한 개방감이 일품입니다. 그래서 킴을 들을 때는 평소보다 볼륨을 조금 올려서 들었습니다. 반대로 볼륨을 줄여서 들을 때에도 중역 이상 대역의 소리는 여전히 음상도 명확하고 존재감이 뚜렷하지만, 아무래도 저역이 좀 허전하게 들리는 것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볼륨도 그렇고, 또 스윗 스팟도 그렇고 잔잔한 비지엠 용도로 사용하기 보다는 메인 음감 용도로 잘 세팅된 곳에서 집중해서 듣는 데에 더욱 어울리는 타입입니다.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 8인치의 그리 크지 않은 페이퍼콘 드라이버도 조금 독특합니다. 페이퍼콘이라는 게 물성으로 따지면 단단함보다는 부드러움이 먼저 떠오르는 재질인데 킴의 저역은 도리어 단단하고 빠르다는 표현이 잘 어울립니다. 양적으로 풍성하지는 않지만 아래를 받쳐 주기에는 충분한 정도였고, 양보다는 단단하고 찰진 타격감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편입니다. 강한 펀치보다는 맺고 끊음이 정확하고 빠른 타격감이었는데, AMT가 만들어 내는 윗대역과의 조화를 생각하면 영리한 튜닝이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저역부터 고역까지 일관된 질감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주파수 응답 스펙상 32Hz까지 떨어지는 극저역은 실제로 들었을 때에도 대구경 드라이버나 서브우퍼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에너지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음감 환경에서 극저역까지 확실히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오히려 지금에서 극저역만 더 뿜어져 나온다면, 탱글탱글한 음상, 빠른 리듬감과 같은 매력이 반감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 큰 스케일의 사운드는 보다 대형 스피커의 몫으로 넘기고, 킴은 적당한 규모의 사이즈에서 적당한 볼륨으로 즐기는 것이 현명합니다. 물론 든든하고 에너지 넘치는 저역, 강렬한 타격감을 선호하는 분에게는 킴의 절제된 저역이 다소 아쉽게 들리실 수도 있을 듯합니다.
핑크팀 킴을 들으면서 저희 같은 음악 감상자뿐 아니라 음악 작업자들도 좋아할 만한 스피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토널 밸런스도 좋았고 음상의 맺힘이나 스피드도 굉장히 정확해서 모니터 용도로 활용하기에도 적합해 보입니다. 오히려 정확성에 초점을 맞춘 저역은 작업자들이 더욱 마음에 들 듯도 하고요. 사실 경우에 따라 조금의 방향 차이는 있겠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컨슈머와 프로 오디오 사이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감상자의 입장에서 킴의 저역 음상이 지금보다 조금만 아래로 내려 갔으면 더 좋게 들릴 것 같은데, 그러려면 또 지금보다는 체급이 커져야 할 것 같습니다.
같은 내용의 영상입니다. 중간 중간 시연과 함께 보시려면 영상으로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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